기획의도와 내용
- 책 소개
SF․스릴러․공포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두 소설가 정보라와 최의택이 바통을 주고받듯 쓴 미스터리 로드무비다. 하나의 장편을 두 저자가 합작하여 문학 집필 방식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야기는 실제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낳았던 ‘국가사업 석유 시추공 프로젝트’에 ‘사기’라는 키워드로 접근하며 시작된다. 일평생 사기꾼의 표적으로 살아온 ‘보라’가 어느 날 시추공 분양 사기 사건의 가해자로 휘말려 그에게 전 재산을 맡긴 ‘의택’과 마주한다.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결국 서로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두 사람은 한편이 돼 진짜 사기꾼을 잡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해프닝이 예측 불가의 사건과 결말로 이어지면서 독자에게 웃음과 충격을 안긴다.
두 저자가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마치 한 사람이 쓴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한 점, 오토픽션을 연상시키는 주인공 ‘보라’와 ‘의택’의 ‘케미’도 독자가 흥미를 느낄 만한 지점이다. 다양한 재미 요소를 바탕으로 시의성 있는 소재를 미스터리와 추리로 풀어내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각종 사기 사건을 색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한다.
- 출판사 서평
정보라 x 최의택 릴레이 장편소설
바통을 주고받듯 쓴 국내 최초 합작 장편소설
일평생 사기꾼의 표적으로 살아온 ‘보라’,
그런 보라에게 전 재산을 맡긴 피해자 ‘의택’이
진짜 사기꾼을 잡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한국형 로드무비
“이 소설은, 일단 정말 재미있다.” _ 김초엽
2022년 공포소설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고, 2023년 같은 작품으로 전미도서상 번역 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25년 SF 단편집 『너의 유토피아』로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세계 독자와 만나고 있는 정보라가 새로운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이번엔 혼자서 쓴 게 아니다. 정보라의 영향으로 SF를 쓰기 시작해 『슈뢰딩거의 아이들』로 제1회 문윤성 SF 문학상과 제9회 SF어워드 장편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이름을 새긴 최의택 과 합작했다. 정보라 작가는 가해자 ‘보라’의 시선에서 최의택 작가는 피해자 ‘의택’의 시선에서 바통을 주고받듯 한 장씩 이어 썼으며, 두 저자가 이런 집필 방식으로 하나의 장편을 합작한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한 사람의 쓴 듯 노련하게 전개되는 290㎞의 여정,
개성적인 캐릭터와 다양한 요소가 만난 미스터리로서의 재미
소설은 일평생 사기꾼의 표적으로 살아온 ‘보라’가 어느 날 시추공 분양 사기 사건에 가해자로 휘말려 그녀에게 전 재산을 맡긴 ‘의택’과 마주하며 시작된다. 맹해 보이면서도 섬찟한 구석이 있는 ‘보라’, 냉철하면서도 마음이 약한 ‘의택’이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결국 서로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상황에서 한편이 돼 진짜 사기꾼을 잡기 위한 여행기에 오른다. 천안에서 포항으로 가는 290㎞의 여로는 순탄치 않다. 각자의 사정이 지독하게 절박하고,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없으며, 진짜 사기꾼들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독자는 계속 웃게 된다. 개성적인 주인공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언행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블랙 유머 덕분이다. 이에 더해 연잇는 해프닝들이 예측 불가의 결말로 치달으며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이 이야기를 두 사람이 합작했다는 집필 방식에서 독자가 놀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특징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전개다. 합작이라는 정보가 없다면 한 사람이 썼다고 봐도 좋을 만큼 이음매 하나 보이지 않는 완성도를 이루고 있다. 노련한 두 이야기꾼이 개성적인 캐릭터와 정교한 이야기 설정 위에서 바통을 주고받듯 290㎞를 질주해 독자를 단숨에 결승선(포항)까지 끌고 간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펼쳐 보인 작가들의 상상력과 통찰력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분명 허구이지만, 정말 허구일까 갸웃하게 되는 지점이 많다는 점이다. 우선 소재가 그렇다. 두 주인공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낳았던 ‘국가사업 석유 시추공 프로젝트’로 악연을 맺는다. 실제로 2025년 9월 한국석유공사는 막대한 국가 예산이 투입된 시추공 사업이 실패했음을 공식화했다. 언론에는 이런 사업이 있었고 결과는 실패라고 요약돼 전해지지만 그 보도 속에 큰 피해를 입은 개인들이 있으리라는 작가들의 짐작과 상상력은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전세 사기, 지식정보산업센터 공실 사태, 허위 광고로 유령 건물이 된 신촌 밀리오레와 부산 네오스포 상사 사태, 대학 신입생 교재 사기 등 사회와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 사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작가들은 각종 사기 사건의 본질과 수법을 논문까지 찾아가며 공부하여 소설을 완성했고, 독자에게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달랐을까?’ 묻는다.
오토픽션 형식을 차용해 생생함과 섬세함을 배가한 한국형 로드무비
주인공들 이름이 ‘보라’와 ‘의택’인 점에서도 독자는 갸웃하게 된다. 자전소설인가 싶어 읽다 보면 금세 알 수 있 다. 허구다. 그럼에도 이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정말 작가인 듯 여겨져 독자는 이색적인 재미를 느끼게 된다. 다만, 이런 설정을 단순 재미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정보라는 “남의 이름을 썼다가 혹시나 실제 사기 피해를 당하신 분이 읽으시면 너무 괴로우실 것 같아서” 제 이름을 주인공 이름으로 썼다. 최의택 역시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지닌 ‘의택’을 주인공으로 삼아 장애인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생하게 전해주고, ‘의택’ 전용 개조 차량을 ‘의택’이 능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통해 ‘능력과 장애를 연결 짓지 못하는’ 통념을 불식해준다.
로드무비라고 할 때 독자는 흔히 유명한 외국 영화나 소설을 떠올린다. 그 픽션들의 사건과 여정은 그것대로 의미와 재미가 있으나 이 소설만큼 현대의 한국 독자에게 피부로 와닿기는 힘들다. 2020년대 실제 있었던 국가사업에 사기로 얽힌 두 주인공, 천안역에서 출발해 경부고속도로 – 낙동강의성휴게소 – 경북 칠곡군 – 안동터미널 – 7번 국도 – 포항역 – 호미곶으로 이어지는 현실 반영적인 동선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독자는 비로소 진정한 한국형 로드무비와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 다종다양한 사기 사건이 바로 나와 이웃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강력한 위협이라는 데에 공감하기에 이른다.
- 추천의 말
아이고 어쩌나, 시작부터 보라는 사기를 당하고 몇 번이나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할 사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장을 보는 나의 머릿속에서도 그동안 내가 당했던 크고 작은 사기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영등포 어느 허름한 사무실에 끌려가 코코아통을 받아 들고 친구들에게 팔아 오는 임무를 받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쳐다보다 영이 맑다는 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이끌려 터무니없는 가격에 영어 회화 테이프를 강매당했고, 없는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하는 전화에 나는 네놈의 수작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언제쯤 알릴까 고심했던 요즘까지 남의 돈 거저먹겠다고 온갖 시나리오를 짜고 연극을 해대는 사기꾼들은 지치지도 않고 우리에게 다음 도전장을 내민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보라와 의택과 함께 포항으로 달려본다. 속 터지는 동행이지만 혼자가 아니라 덜 막막하고, 나만 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가 되는 건 뭔 심사인지.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라. 내 인생 왜 이래, 외통수로 막막한 상황이라면 보라와 의택과 함께 달려보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포기’가 아닌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_ 서미애 (소설가)
포항 앞바다 ‘대안고래 질주 프로젝트’ 사기 범죄로 엮인 보라와 의택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당탕탕 포항으로 향하는 이 소설은, 대체 장르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말 재미있다. 사기당하는 이야기, 뺏긴 돈 돌려받아야 하는 답답한 이야기인데도 그렇다. 두 사람이 모는 차에 한 번 올라타면 내릴 방법이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같이 도로를 달리는 수밖에.
가해자 보라와 피해자 의택이 만나게 된 사연은 슬프고 웃기고 씁쓸하다. 제발 거기서 그러면 안 된다고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어지다가도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달랐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빠르게 질주하면서도 한 번씩 덜컹거리며 과속방지턱을 지난다. 고민의 덫이 곳곳에 놓여 있다. 왜 사기는 속이는 사악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지, 어떤 이들은 왜 ‘나쁜’ 사람으로 변모하는 일에 더 취약한지, 사기가 얼마나 당하는 이들의 삶을 벼랑으로 몰아붙이는지.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이 소설은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끝난 게 아니라고 믿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고,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려는 이들의 이야기여서, 두 사람을 마냥 미워할 수도 응원할 수도 그렇다고 탓할 수도 없게 된 독자들을 기어이 포항까지 끌고 가고 만다. 끝나야만 하는 여정이 한 장면이라도 더 이어지기를 바라도록 만들면서.
_ 김초엽 (소설가)
- 작가의 말
정보라 최의택 작가님의 시추공 분양 사기 제안 넘 좋았어 요.
최의택 제가 제안했던가요?
정보라 석유 시추 가지고 뭔가 사기가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시추공 분양은 작가님이 말씀하셨어요.
최의택 참 이상한 소리를….
정보라 넘 개연성 있는 제안인 것입니다…. 계엄 사태 안 났으면 누가 사기 쳤을 거예요.
최의택 참 아이러니하죠. 작가님은 저랑 둘이 채팅할 때도 사기 얘기만 하셨잖아요. 사기 덕후.
정보라 전세 사기부터 시작해서 지식정보산업센터 공실 사태라든가, 허위 광고로 유령 건물이 된 신촌 밀리오레랑 부산 네오스포 상가 사태라든가….
최의택 어휴. 사기가 너무 많아….
정보라 이번 소설 쓰기 전부터 관심도 있었고 최근에 다단계 사기 방지(?) 팟캐스트 들으면서 수법을 구체적으로 배우니까 이해가 더 잘 되기도 했어요.
최의택 작가님한테 사기 얘기 듣고 있노라면 무서워져요, 세상이.
정보라 한국 경찰도, 법원도 사기는 한 10억 넘어가지 않는 이상 수사나 처벌을 잘 안 해요. 폭력 범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범죄는 “죄질이 가볍다” 이런 식이더라고요. (…) “그러게 조심하지” 이런 식으로 피해자 탓하는 경향이 큰 거 같아요.
최의택 그 포인트가 저희 소설에서 좀 살았으면 좋겠네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 저는 사실 마지막 장면을 스티븐 킹의 코즈믹호러를 염두에 두고 쓰기는 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구현됐는가는 다른 문제지만요.
정보라 작가님이 고생해서 쓰신 ‘보라’의 마지막 장면, 마음에 들었습니다.
- 차례
- 강남 테헤란로, 사기의 해부
- 천안 순천향대병원, 마이크 앤드 존
- 천안역, 대면
- 경부고속도로, 사고와 사기
- 동강옥화휴게소, 부름
- 낙동강의성휴게소, 밑져야 본전
- 경북 칠곡군, 히치하이커
- 안동터미널, 미행
- 7번 국도,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 포항역, 추격
- 호미곶, 일출
- 천안 단국대병원,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말
- 지은이
정보라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 어둡고 마술적인 이야기,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지은 책으로는 『저주토끼』 『여자들의 왕』 『아무도 모를 것이다』 『호』 등이 있다.
1998년 「머리」가 연세문화상에 당선되었고. 「호狐」로 2008년 제3회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 「씨앗」으로 2014년 제1회 SF어워드 단편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2022년 『저주토끼』로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고, 20개국 이상에서 번역되며 전 세계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2025년엔 SF 단편집 『너의 유토피아』로 필립 K.딕상 후보에 오르며 전 세계 독자에게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최의택
2019년 제21회 민들레문학상에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으로 대상을 받았고, 《저의 아내는 좀비입니다》로 예술세계 소설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정보라의 영향으로 SF를 쓰기 시작하면서 완성한 『슈뢰딩거의 아이들』은 제1회 문윤성 SF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2022년 SF 어워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인간』, 장편소설 『0과 1의 계절』, 에세이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등을 출간했으며, 다수의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 책 속에서
보라는 매일같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 소식을 하나씩 점검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획기적인 정보였다.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이라고 했다. 50년 전에도 석유 시추에 성공했는데 그때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시추가 중단되었다고 했다. 시추를 재개하면 동해 앞바다에서 석유가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 동안 수억 톤이 쏟아질 거라고 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신문 기사와 함께 표와 그래프는 물론 국토부가 발간한 백서까지 투자방에 차근차근 올라왔다. 그리고 사라졌다. 보라가 결정적으로 시추공 투자 정보를 믿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정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6쪽
의택은 멈칫했다. 내가 장애인인데 장애인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려고 친구랑 준비 중이었다, 그 돈 아니면 나랑 친구랑 다 죽는다, 뭐 이렇게 말하나? 그걸 믿나? 아니, 믿든 아니든, 이게 다 무슨 짓이지? 의택은 그냥 죽고 싶어졌다. 존이 이대로 연락을 끊어버린대도 할 말이 없었다. 사고 직후 내내 시달렸던 무력감이 다시금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다시 손이 약통이 있는 주머니 쪽으로 갔지만 이번에는 억지로 그 손을 물렀다. 차라리 잘됐다. 활동지원사가 오기 전에 죽자. 시체가 된 의택을 보고 놀라긴 하겠지만 프로니까, 잘 처리해주지 않을까?
– 어… 저기요….
존이 말했다.
–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의택은 숨이 가쁜 것도 잊고 존의 다음 말풍선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 존이 던진 내용은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저희 아무래도 투자금을 모두 잃은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 니다. | 45쪽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뭐에 씌어서 남은 인생, 의택의 인생뿐 아니라 현도의 인생까지 걸린 돈을 시추공 같은 것에 쏟아붓고는 웬 낯선 존재와 낯선 장소를 향해 달리고 있는 걸까. 의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복이 나가요.”
보라가 말했다.
“이미 다 나갔거든요.”
“다시 들어오려다가도 나가버려요.”
“뭐 하는 분이세요?”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라는 존의 화법으로 대답했다.
“저요? 음, 이것저것 해요. 카페에서도 일하고, SNS도 운영하고, 주식도 하고, 코인은 해보려고 월렛까지는 깔아봤는데….”
그러니까 백수라는 말이구만. | 84쪽
“사기당한다고 바보 아니에요!”
느닷없는 성화에 의택은 깜짝 놀랐다.
“바보라고 사기당하는 것도 아니고, 사기는 그냥 사기예요. 사고 같은 거라고요!”
의택은 할말이 없어서 잠시 앞을 봤다. 이른 시간임에도 휴게소 앞은 형형색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북적였다. 저 사람들 모두가 살던 곳이 아닌 곳으로 가고 있는 건가. 간다는 게 그렇게도 일상적인 건가. 하긴 의택도 지금 휴게소에 있지 않나. | 92쪽
“내려줘요.”
보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 내릴래요.”
의택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기 고속도로 한가운데인데 내리긴 무슨 수로 내려요.”
“그럼 고속도로 아닌 데 내려줘요.”
보라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내가 무슨 택시 서비스인 줄 알아요?”
의택의 목소리도 드디어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타고 온 기름값 내놔요. 그럼 내려줄 테니까.”
“내릴래요.”
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내려주면 문 열고 뛰어내릴 거예요.”
“문 열 수 있으면 열어봐요.”
의택이 받아쳤다. | 144쪽
바다는 새파란 띠처럼 지평선을 감싸며 이어졌다. 바다의 생생한 파란빛과 하늘의 부드러운 연한 파란색이 솔기처럼 이어지는 곳에 구름 조각이 조금 흩어져 있었다.
구름 조각이 점차 구름 덩어리로 변하더니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사이로 햇살이 비치는데도 비가 내렸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비가 와도 바다는 아름다웠다. 돈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포항에 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잠깐이지만 잊고 그 파란색을 넋 놓고 바라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짙고 강한 아름다움이었다. | 172쪽
“사람이 다 그래요. 솔직히… 내 친구 돈까지 끌어 다 넣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했어요. 공동 창업하려고 친구랑 반씩 모으고 있었거든요. 뭐, 지금도 그 절반이 날아가 버려서 친구 놈 인생도 경로가 이탈되긴 했지만….”
“그건 좀 그렇긴 하네요.”
“저기요, 가해자 씨.”
보라는 다시 고개를 떨꿨다. |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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